구스 반 산트(2003), 캐서린 비글로우(2008) 감독의 작품
거의 모든 영화는 순차적으로 갈등을 빚어내고 암시하는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고 관객은 그러한 흐름에 익숙해져있다.
하지만 이 두 영화는 관객들의 예상을 빗나가게 만든 독특한 서사 구조를 가진 영화이다.
2015년 4학년 2학기 영화의 이해란 교양 수업의 기말고사 리포트로 작성한 비평문으로 내가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좁았는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 좋은 수업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바라보는 것만큼 잔혹한 것은 없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매우 제각각이다. 책을 읽을 바에는 차라리 나와서 영화를 보며 여가를 보내는 사람도 있고, 공부를 하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위해 분석하며 보는 사람도 있고, 그저 현실을 잊기 위해 아무생각 없이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겐 영화는 공통적으로 비현실세계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간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스크린이 꺼지고 상영관의 불이 켜지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는 아주 짧은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단편적인 순간을 감동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는 반면, 또다시 울적해져 가버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를 보는 순간은 복잡한 현실을 잠시 잊어버리는 중요한 시간이 된다. 영화에서 얻는 제각각의 가치가 이제는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잊어버리는 행위를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그 잊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이상향을 갈망하는 인간의 욕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급한 시간 안에 끝나 버리는 우리의 욕구해결을 천천히 방해하는 영화들이 있다. 캐서린 비글로우의 허트로커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는 서사를 포기하고 관객들을 현실로 다시 끌어낸다. 그 독특한 서사구조와 주제의 관련성을 분석해보았다.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는 허트로커에서는 폭탄제거라는 특수한 형식을 가지고 이끌어간다. 하지만 폭탄제거는 결국 전쟁의 잔존일 뿐이고, 배경은 여전히 끔찍한 전쟁터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폭탄이라는 최고의 긴장감을 상기시키는 무기가 스크린 안에서 어떠한 형태로 폭발을 할 것인가 사람들은 기대를 하지만, 당연하게도 제거된 폭탄의 수와 사망한 군인들의 수는 비례하며 늘어나기만 한다. 그리고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우리는 그 긴장감이 익숙해져간다. 이러한 사실이 더욱더 영화를 현실적으로 내비친다. 일상적인 현실의 전쟁터와 무감각해지는 병사들. 수많은 사고와 죽음들이 갈등을 불러일으킨다는 전제는 전쟁터 외에서만 적용이 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서사의 구조가 현실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첫 시퀀스에서는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병사의 희생으로 영화의 방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약 20분 후에 나타나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중사와 그 부하들의 갈등도 영화의 집중을 높여준다. 중후반에는 주인공의 죄책감과 슬픔으로 더욱 관객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클라이맥스로 보였던 자살폭탄의 해체 실패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연기구름 속으로 날아가 버리고 관객은 허무하게 주인공의 담담한 발걸음을 지켜보고 있다. 예상하는 결말과는 다르게 주인공의 내면의 변화는 물론 영화 속 세계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끝이 어떤 형식이든 관객들에게는 ‘한 편을 보았다’는 큰 성취감을 주기 때문에 어쩌면 영화 속 세계는 끝이 있는 것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전쟁의 현실은 죽음이나 누군가의 사정은 전혀 의미가 없다. 감독은 실제 전쟁터의 긴장감을 서사구조로써 표현해내었다. 전쟁에는 해답과 끝이 없듯이 전쟁터로 향하는 주인공의 뒷모습은 무참히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관객은 어렴풋이 깨닫고 현실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다. 스크린의 세계는 눈앞의 세계로 전환되어버린다. 가상과 현실의 차이점은 회복의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반복되는 전쟁으로 무감각해져버리는 현실을 맞닥뜨리면 평화를 원했던 가상현실은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 주제는 더욱 깊게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다. 현실적인 다큐멘터리보다 더 현실적인 가상현실을 이야기의 흐름으로 나타낸 것이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 엘리펀트도 허트로커와 같은 현실적인 흐름을 기반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화는 총기 난사 사건이란 무거운 소재를 중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학교를 배경으로 그 때의 모습을 그저 담담히 보여주는 역할을 선택했다. 학교에서는 해소될 갈등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학생들의 미숙한 인간관계의 삐걱거림이나 사춘기시기에 겪을 수 있는 고통과 고민은 모두가 겪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소외감에서 얻는 자아의 불협화음은 외부인은 알 수가 없다. 그 불협화음의 결과가 전 세계에 전파될만한 끔찍함을 선사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주목하지만, 그동안 존재했던 흔한 일상을 사람들은 지나쳐버린다. 결국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피의자를 특정지어서 악의 대변인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현실의 대변인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흔한 소외는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고 그 한편에는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이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푸르고 활기찬 풍경 아래 어둡고 의기소침한 아이들의 존재를 대비시키면서 보여주는 현재 학교의 모습을 감독은 서사를 포기하면서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첫 장면과 중반부, 그리고 엔딩에서는 공통적으로 푸르스름한 하늘이 비춰지고 있다. 맑은 하늘에 잠시 구름이 걸쳤다가 서서히 해가 그 사이로 빛을 내뿜는 모습은 살면서 흔히 보았던 일상의 모습이다. 변함없는 자연 아래에 존재하는 학생들의 생활 풍경을 카메라는 그저 따라가며 보여준다. 보통 영화에서는 비도덕적인 사건을 다룬다면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피의자의 불우한 환경 속으로 파고 들어가 인물 중심으로 서사를 만든다. 하지만 엘리펀트에는 주인공이 없고 목격자, 피해자, 피의자 모두 서사 속에서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마치 여러 개의 서브플롯을 하나로 합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학교’라는 현실은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는 배경 중 하나이다. 감독은 사건의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개개인의 학생을 초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학생들의 시선이 관객의 시선과 겹쳐지면서 아무리 끔찍하고 잔인한 사건이라도 현실에선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일상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인상을 준다. 모든 시선이 한 곳을 향하는 순간 끔찍한 현실이 일어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그 뒤의 피의자와 피해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어떤 형식으로 사건이 결론이 났는지, 애초에 그들이 계획을 짜기 시작한 직접적인 동기는 무엇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학생들의 일상을 봐왔던 관객들은 되레 짐작할 수 있다. 소외받고 있는 학생과 남모를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학생,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 선생, 위로받는 학생과 위로하는 학생 등, 수많은 현실이 지나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 살상은 관객들은 예측할 수 있었다. 알고 있지만 막을 수 없는 비극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긴장감을 주지 않는 서사구조에서 영화는 관객들을 현실로 끌어들여 감정을 유도한다. 그리고 그 무력감은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한다. 소외된 아이들의 비극을 비중 없이 모든 사람의 시선으로 이끌어가는 구조가 더 큰 여운을 남긴 것이다.
결국 허트로커와 엘리펀트는 주제의 공감을 끌어내기 위하여 현실성을 택했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서사 구조의 형식을 벗어났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끝없이 반복될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과 소외는 현실에서 막연해버린 것들로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다. 이미 무감각해진 고통을 수없이 보고 겪은 우리들에겐 이러한 주제는 더 이상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흔한 서사구조의 형식을 택했다면 만연한 잘못된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채 저편의 가상현실로 밀어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감독들은 관객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를 진실로 바랐기 때문에 형식을 파괴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선택이 두 영화 모두에게 큰 빛을 발했다. 상황이 잘못되었고 문제가 있다고 판단을 내렸을 때, 보통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한다. 가장 객관적인 시선이 문제의 핵심을 바라볼 수 있고 나중엔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회피하는 법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반드시 잘못된 방법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전자를 택하고 변화를 꿈꾼다. 이 영화들도 그 현실을 바라보며 변화를 책임지고자 했던 감독들의 주장의 한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비슷한 구조의 두 영화도 인물의 서사에 대해서는 확연히 다른 길로 걸어갔다. 전쟁터와 학교 둘 다 수많은 인물들이 존재하는 배경이지만, 허트로커는 한 인물을 중점으로 주변인물들의 플롯을 추가했다면 엘리펀트는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배경을 중점으로 인물을 바라보게 만든다. 캐릭터도 서사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만큼, 몇 명의 어떤 인물을 다루느냐에 따라 느낌이 매우 달라질 수 있다. 허트로커는 다른 영화들과는 큰 차이 없이 주인공이 존재하고 주인공의 성격과 현재 갈등을 유추할 수 있는 플롯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있어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의 성격은 주변 인물들을 통해서 드러나고 내적 갈등도 유발한다. 그러나 주변과 상관없이 고통을 껴안은 채 계속 나아가는 불연소의 모습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엘리펀트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존재한다. 보통 다루는 인물이 많아질수록 이야기는 복잡해지거나 성의 없이 압축이 되어버리고, 관객들은 각각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엘리펀트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단편적인 시간을 쪼개서 각각의 시선들로 이루어진 편집들이 오히려 더 섬세하게 현재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그 섬세한 시선은 또한 인물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만 그 이야기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혼란과 함께 반복되는 장면은 집중을 흐트러뜨리기도 한다. 큰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수많은 언덕들을 한 화면에 채우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수많은 시점을 가진 짧은 포착들 중 대개는 평평한 도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이 지루한 현실의 모습이라는 것을 두 영화는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실적인 삶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약 2시간 만에 담아낼 수 없는 넓고 평평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오히려 완만한 형태의 인생을 바라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평생을 걸쳐 겪을 무수한 우여곡절을 짧은 시간 안에 보여주는 영화를 보고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은 모두에게 큰 관심을 받고 싶고,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고 싶고, 열렬하게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 본능을 억누르고 안정적인 삶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라고 자위하며 살기 시작하는 걸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렇게 주장하기 시작하니까. 그래서 영화는 우리의 욕구를 풀어주는 도구 중 하나가 되었다. 무언가를 표출하고 영향을 받는 욕구는 여전히 지속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 위안을 무참히 드러내는 영화들이 있다. 허트로커와 엘리펀트를 보면서 나는 허를 찌르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분하고 재미없는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 의존하고자 하는 허약한 인간의 본능이 밟히는 기분이다. 여전히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고, 영화 속의 세계는 허구의 이상향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 영화들은 객관적으로 인물과 그와 관련된 모든 세계를 바라보고 있고 스크린을 통과해 모든 이들의 마음을 꿰뚫어본다.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의 미래가 있다. 수많은 갈등이 존재하는 현재는 회복불가능 상태이다. 과거의 영광을 위해 역행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 현실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인간의 존재는 미세한 먼지와 같이 느껴지고, 결국엔 아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그래서 망상을 하고 현실을 회피하고자 한다. 결국 그것은 행복이라는 욕구가 항상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허나 인간은 때로는 행복하기 위해 가장 비참한 현실을 바라보고자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동정하고, 죄악감에 시달리고, 타인의 행복을 우선시 하는 본능 또한 존재하고 있다. 현실의 비참함이란 인생의 평탄한 길을 한 번 휘어주는 역할을 하고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행복을 위한 길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한 길이 존재하다는 것을 뚜렷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표현한 이 두 영화를 걸작이라고 칭하고 싶다.